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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소식

[경향신문] 단체가 모여 엮어내는 ‘거미줄 복지’…영국에서 답을 찾다(2015.9.19)

[‘지역 재생’ 고민하는 한국 청년들 100년 사회적기업 방문]단체가 모여 엮어내는 ‘거미줄 복지’…영국에서 답을 찾다


도시는 ‘생명’이다. 사람과 더불어 북적북적 생기를 띠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들기도 하고 쇠락한 도시가 새 삶을 찾기도 한다. 영국의 브리스틀, 뉴햄 지역은 주변을 대표하는 항구도시로서 수백년간 전성기를 누리다 항구가 폐쇄되고 지역 경제의 중심이 바뀌면서 급속히 쇠락했다. 일찍이 영국은 ‘죽은 도시’에 새 삶을 불어넣는 대안으로 지역 중심의 커뮤니티 활성화를 내세웠다. 지방 곳곳의 ‘구(舊)도심화’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한국도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사단법인 씨즈(www.theseeds.asia)가 주관하고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와 한화생명이 후원하는 ‘2015 SEEKER:S(씨커스) 청년, 세계에서 길을 찾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9일까지 ‘동네방네 협동조합’이 영국의 유서 깊은 사회적기업들을 찾았다. 영국에서도 오래된 문제인 구도심의 쇠락.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난 반세기 영국은 지역 커뮤니티 강화를 추진했다. 한국 청년들이 그곳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소개한다.

■ 지역복지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

“우리의 목표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만난 ‘바턴힐 세틀먼트(Barton Hill Settlement)’의 부대표 폴 심프슨은 단체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11년 창립된 바턴힐 세틀먼트는 지역 주민들과 공생해온 유서 깊은 사회적기업이다. 이 기업의 커다란 건물에는 뜻을 함께하는 다양한 자선단체와 사회적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들과 협력해 촘촘한 ‘거미줄 복지’를 실현하는 게 바턴힐 세틀먼트의 사업모델이다. 지역 복지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심프슨 부대표는 “바턴힐 세틀먼트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서비스 외에도 입주자 단체들의 복지가 맞물려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며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단체가 할 수 있도록 토양을 마련해주고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우리의 모토”라고 말했다.

영국 브리스틀의 사회적기업 바턴힐 세틀먼트(Barton Hill Settlemet) 사옥은 여러 채의 건물이 정원을 둘러싸고 모여 있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건물에는 입주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식당 등이 있다.


바턴힐 세틀먼트가 자리 잡은 브리스틀 지역은 강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한때 ‘잉글랜드 제2의 도시’라 불렸다. 그러나 항구가 이전하면서 지역 전체가 급격한 쇠락을 맞게 됐다. 현재 브리스틀 내 바턴힐 지역의 경우 전체 도시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이주민 출신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턴힐 세틀먼트는 사업의 강조점을 여러 번 바꾸었다. 그러나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이 있다. 지역 주민의 요구와 복지 수요에 맞춰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다. 심프슨 부대표는 “1차 세계대전 때는 남편 잃은 과부들을 위한 지원이나 아이들의 복지를 위한 사업이 주가 됐다”며 “시대가 흐르면서 현재는 고립된 1인가구, 이주민, 실직자를 돕는 사업들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바턴힐 세틀먼트 건물.


‘블록 녹스(Block Knocks·문 두드리기)’는 바턴힐 세틀먼트의 지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업 중 하나다. 직원들은 주기적으로 사회보장아파트의 독거 세대들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센터에서 진행 중인 사업을 소개한다. 바턴힐 세틀먼트가 제공하는 지역 주민 서비스의 연간 이용 건수는 2만7000건을 상회한다. 바턴힐 지역 전체 인구가 3400여명이니까 대략 주민 1명당 연간 10건꼴로 서비스를 제공받는 셈이다.

바턴힐 세틀먼트에 입주한 단체 중 한 곳인 ‘데크 발(Dhek Bhal)’의 헤라 하크 대표는 “동남아 출신 이주민들의 언어, 문화적 문제를 해결하고 정착을 돕기 위해 1986년 단체를 창립했다”며 “우리 단체는 단순히 지역 노인들에게 홈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스태프 86명을 채용해 지역 이주민 고용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버스(Play Bus) 사업을 진행 중인 ‘칠드런 플레이버스(Children Play Bus)’는 ‘놀 거리’가 없었던 40년 전부터 버스에 장난감을 싣고 주로 낙후 지역을 돌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커뮤니티 링크의 제럴딘 블레이크 대표(왼쪽)와 바턴힐 세틀먼트의 입주단체 중 하나인 데크 발의 대표 헤라 하크.



■ “가난은 돈만으로 해결 못해”

런던 동부에 위치한 뉴햄 지역에도 주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 사회적기업이 있다. ‘커뮤니티 링크(Community Link)’다. 커뮤니티 링크는 웅장한 사옥과 ‘후추알 임대’로 유명하다. 정부는 20여년 전 입주할 곳을 찾지 못해 고생하던 커뮤니티 링크에 정부 소유의 옛 의회 건물을 ‘후추 한 알’ 값에 125년간 임대했다. 건물을 둘러보니 강당, 현판 등 수십년 전 의회 건물로 쓰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뉴햄 지역 복지의 든든한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사회적기업과 자선단체들이 임차료를 내지 못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지역 복지에 안정적으로 힘을 쏟게 해준다.

지난 7일 방문한 영국 뉴햄 커뮤니티 링크(Community Links) 건물. 이 건물은 커뮤니티 링크가 정부로부터 안 쓰는 옛 의회 건물을 ‘후추 한 알’ 값으로 125년간 임대를 받아 유명해졌다.


커뮤니티 링크의 제럴딘 블레이크 대표는 “정부 기관이 유휴 공공부지나 공공건물을 사회적기업에 임대하는 건 영국의 오랜 전통”이라며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자금난에 시달리는데 커뮤니티 링크의 경우 건물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어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커뮤니티 링크는 ‘새로운 복지 아이디어’로도 유명하다. 커뮤니티 링크는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여왔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한 번 길을 잃고 범죄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유소년 시절의 ‘빠른 대응(Acting Early)’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찰을 돌며 소년범의 범죄현장에 경찰보다 먼저 도착해 문제의 소지를 완화, 교화하는 ‘인스턴트 리스폰스 유닛(Instant Response Unit·즉각대응팀)’, 학교 밖 청소년들이 스스로 가판대를 꾸려 사업을 벌일 수 있도록 컨설팅해주는 ‘배로 보이즈앤드걸즈 아카데미(Barrow Boys & Girls Academy·장바구니 청소년수업)’ 등이 커뮤니티 링크가 해온 대표적인 청소년 서비스다.

커뮤니티 링크는 2007년 최초로 ‘소셜 임팩트 본드(Social Impact Bond)’ 프로젝트에 참여해 성과를 내는 등 복지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소셜 임팩트 본드는 정부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시하면 사회적기업이 이를 수행하고 목표를 달성할 경우 성과금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일반 대기업도 수행 경비를 투자해 성과금을 나눠 갖는다. 예를 들어 정부가 ‘서울 마포구의 범죄율을 낮추라’는 10년짜리 프로젝트를 제시하면 이를 사회적기업이 수행하고 대기업이 돈을 투자해 성과에 따라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소셜 임팩트 본드는 영국뿐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블레이크 대표는 “가난의 해결법은 ‘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지식 수준이 낮고, 아는 게 없어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하며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가난하다”면서 “이런 빈곤의 악순환은 일자리 알선, 교육, 의료지원, 상담 등 복합적인 복지 서비스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구조적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누군가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는 것이, 떨어지고 나서 앰뷸런스를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든다”며 “빈곤, 이주민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복지의 핵심이자 사회의 행복도를 높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춘천서 활동하는 청년협동조합 ‘동네방네’

“지역·우리 모두 잘되는 삶터 꿈꿔요”



ㆍ“젊은 애들 경계하던 주민들 소통하다 보니 벽 허물어져”

아무도 찾지 않던 허름한 여인숙이 청년들의 손을 거치자 멋진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이 청년들은 지역 주민들과 협력해 쇠락해가는 구도심의 지역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강원 춘천에서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운영 중인 ‘동네방네 협동조합’(이하 동네방네) 이야기다. 동네방네는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지역 재생’을 고민하는 청년 다섯이 모인 청년협동조합이다.

지난 5일 영국 런던에서 만난 동네방네 조한솔 대표(29)는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지속가능한 모델에 대한 고민 때문에 영국 탐방 계획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동네방네 협동조합의 염태진 조합원, 조한솔 대표, 커뮤니티 링크 제럴딘 블레이크 대표, 김윤철 조합원(왼쪽부터)이 커뮤니티 링크에서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동네방네 제공


조 대표는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협력, 공생할 수 있을지가 가장 고민이라고 했다. 처음 시장 상인들은 낯선 청년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지역 상인들과 협력해 사업이나 행사를 해보려고 해도 동의를 구하기 어려웠다. 조 대표는 “웬 ‘새파랗게 젊은’ 애들이 나타나 뭔가를 하려고 하니까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카페에서 시장 상인들이 직접 DJ를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등 조금씩 벽을 허물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동네방네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경우 인근 시장 내 가게 9곳에서 현금처럼 사용가능한 3000원짜리 쿠폰을 모든 투숙객에게 지급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가 잘되는 것이 조합의 이익을 넘어서 상인들의 이익, 지역의 이익도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조 대표는 이 일을 몇 십년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고 했다. 방치돼왔던 여인숙을 한 달에 30만원이라는 싼값에 빌려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지만 비용 문제는 항상 골칫거리다. 조 대표는 “하고 싶은 사업은 많은데 당장 3000원 쿠폰 주는 것도 부담일 때가 있다”면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운영돼온 영국의 사회적기업은 어떻게 지속가능한 수익구조를 만들어내는지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이번 탐방에서 “지역 재생을 위해서는 역시 지역 주민들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바턴힐 세틀먼트의 경우 지난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자산관리 컨설팅’ 사업을 새로 설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때그때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문제를 소통을 통해 이끌어내는 것이 그들이 100년이란 시간 동안 지역 주민과 공생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동네방네는 ‘춘천 중앙시장 상인회원’이기도 하다. 조 대표는 “상인과 우리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시장바닥에서 도우며 공생할 수 있는 관계가 됐으면 한다”며 “우리가 잘되는 길이 곧 시장 상인들이 잘되는 길이 되고 종국에는 구도심이 살아날 수 있는 길로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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