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역사의 윤리공동체, 80년 역사의 건물
런던 시내의 레드 라이온 광장 근처에 위치한 콘웨이홀은 1929년 건립되었고, 콘웨이홀 윤리 공동체라는 이름의 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윤리학회도 아니고 윤리공동체(Ethical society)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대단히 생소하게 다가왔고, 특히 윤리 공동체 자체의 역사가 200년이 넘었다는 사실은 웬만한 단체의 역사가 길어야 100년을 넘지 못하는 한국인의 처지에서 짐작할 수 없는 거리감을 주었다. 콘웨이홀이 각종 강연과 토론회,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생각공방>팀원들의 머릿속에서 미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윤리를 다루건 그렇지 않건 하나의 공동체가 200년 이상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점, 또한 그 공동체가 소유한 하나의 건물이 8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 모두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생각공방>팀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궁금증에 빠진 채 콘웨이홀을 찾았고, CEO를 맡고 있는 짐 왈쉬Jim Walsh씨와 만나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손 : 콘웨이홀의 CEO로 지내는 소감이 어떤가?
짐 :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CEO로 일하기 시작한 뒤 지난 삼 년동안 지나간 날들이 하루도 서로 같은 적이 없었다. 내가 일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사진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콘웨이홀을 관리했다. 나도 기본적으로는 이사진이 요구하는 대로 콘웨이홀을 운영하지만, 콘웨이홀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거나, 새로운 경험을 방문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이사진을 설득하기도 한다. 콘웨이홀에서는 연극, 예술전시, 콘서트, 강좌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그만큼 많은 시설들이 있기 떄문에 한꺼번에 많은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한다. 콘웨이홀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 동시에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손 : 콘웨이 홀이 발언의 자유Freedom of speech와 독립적인 사유Independent thinking를 보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짐 : 영국 문화는 오래 전부터 개인의 생각을 발언할 기회를 보장해왔고, 콘웨이홀과 윤리공동체 또한 그 전통을 따라왔다. 공동체가 사우스 플레이스South Place에 거점을 두고 있던 시절 윌리엄 존슨 폭스William Johnson Fox라는 분이 공동체의 대표로 일하고 있었는데, 윌리엄은 선거권을 빼앗긴 사람들과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받았던 여성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한편 콘웨이 홀이 이름을 따온 몬큐어 콘웨이Moncure Conway라는 분도 윤리공동체의 대표로 일하였는데, 몬큐어 또한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소유했던 노예들을 풀어주고 잉글랜드로 온 전력이 있었다. 몬큐어는 자신의 결정이 전통을 거스르고 가족의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는 인간의 억압이라는 더 큰 문제에 초점을 두고 윌리엄과 같은 가치를 역설하였다. 나는 윌리엄과 몬큐어 두 사람이 윤리공동체의 정체성, 즉 발언의 자유와 독립적인 사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손 : 이 곳에 오기 전에 미리 콘웨이홀의 웹사이트를 방문하고 이 곳의 역사를 간단히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콘웨이홀 윤리공동체가 처음에는 종교 공동체로서 출발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종교 공동체가 윤리 공동체로 변화해 왔는지 알고 싶다.
짐 :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다. 콘웨이홀을 방문한 사람들과 시설 내부를 둘러볼 때 윤리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으레 묻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년 전 처음 종교공동체가 설립되었을 때는 침례고 단체였고 교단주도 존재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비숍스게이트가 있는 곳 근처의 의회 코트Parliament court에서 모임을 주최했다. 당시 공동체에서 일했던 윌리엄 존슨 폭스가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하고, 그들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이 종교적 전통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저 전통이라서 지키곤 했던 종교적 계율들을 자신들이 진정 '믿기에' 따르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위한 규율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부터 공동체는 천천히 바뀌기 시작하여 신도 대신 회원을 받고, 교단주 대신 대표를 두며, 강의를 할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하고, 수도승복을 입지 않는 등의 과정을 통해 '사우스 플레이스 협회'로 변모하였다. 이를 스탠튼 코잇Stanton Coit이 뉴욕의 윤리 공동체 사례를 참고하여 그 이름을 '사우스 플레이스 윤리 공동체'로 바꾼 것이 윤리공동체로서의 시초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시에는 삼위일체 교리의 부정을 비롯해 성가대나 경전, 신의 존재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수준이었고, 오늘날의 모습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오늘날의 콘웨이홀 윤리 공동체는 인문주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8년 당시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버리기로 한 것은 과감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권 : 콘웨이홀에서 열렸던 강좌 중 유명한 것을 하나 소개해줄 수 있는가?
짐 : 우리가 제공하는 강의 중 하나로 '콘웨이 기념 강연'을 들 수 있는데, 1910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몬큐어의 동료들은 그를 기리고 싶어했고, 기념의 수단으로 출판, 동상 건립 등의 사업과 함께 강연 개최를 기획하게 되었다. 1922년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와서 '자유로운 생각과 정부의 선전'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고, 2년 전에는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방문하여 '빅뱅 이전의 흔적 찾기'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고, 조지 버나드 쇼도 콘웨이 홀에서 강연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재즈 음악가나 예술 비평가 등 많은 사람들이 콘웨이 기념 강연을 거쳐갔다.
박 : 콘웨이홀이 맞닥뜨리는 인력 문제나 재정난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짐 : 콘웨이홀은 외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다. 내가 콘웨이홀 CEO의 직책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재단에 찾아가서 재정지원을 제안하면 주로 거절당하곤 하였고, 주변 사람들도 '지난 10년동안 콘웨이홀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지난 3년간 콘웨이 홀이 어떻게 하면 '돈을 지원해 주면 제대로 쓰는' 기관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제는 사람들도 콘웨이홀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조만간 큰 금액을 지원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콘웨이홀을 통째로 개조할 수 있을 만큼의 지원을 요청해볼 생각이다.
재정지원을 받는 문제가 내 머리 한 켠을 항상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켠에서는 콘웨이홀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에 대한 궁리를 하고 있다. 콘웨이 홀에 있는 주 강당을 포함한 여러 방들 중 일부를 외부에 빌려주는 것도 그 일환이다. 우리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 도서관 위에도 방들이 몇 개 있는데, 한 곳은 외국어 학습 모임에 빌려주었고 다른 한 곳은 중국인의 개인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다. 콘웨이홀이 런던 중앙에 위치하고 이미 입소문이 괜찮게 돌고 있어서 공간 대여 사업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홍보를 진행하지 않아왔다.
지원금 따내기, 공간 대여를 통한 수익 창출 외에 또 중요한 것은 지출을 관리하는 것이다. 인건비로 인한 지출이 총 지출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콘웨이홀이 사실상 1년 내내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개방되어 있어 관리를 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건물 내 전선들을 재배치하는 데 5000파운드를 써야 했을 정도였다.
손 : 콘웨이 홀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행사들 중에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겠는가?
짐 : 'Music Up Close'라는, 2년 전에 처음 시작했던 6주짜리 음악 수업이 있다. 일반적으로 관객과 연주자 사이에 존재하곤 했던 심리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연주자들이 곡의 일부를 연주하면, 작곡가가 그 부분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휘자가 왜 지휘봉을 특정 패턴으로 휘두르는지 같은 것들을 수강생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의 마지막에는 수강생 40명들을 주 강당으로 데려가 40명의 오케스트라 멤버들 사이에 한 명씩 앉혀 놓고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연주를 듣게 하였는데, 수강생들과 연주자들 모두 대단히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다.
권 : 콘웨이홀이 기본적으로 인문주의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인문주의가 인문학과는 다소 다른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메일에서 해 주셨다. 그러면 짐 왈쉬 대표가 생각하는 인문주의와 인문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짐 : 물론 두 가지는 시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점이 얼마든지 부각될 수 있다. 영국 인문주의 협회에서는 인문주의에 기반을 둔 캠페인을 하고 있고, 그 외의 다른 활동들도 모두 인문주의에 기초를 두는 등 '인문주의'라는 단어 자체와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는 편이다. 반면 콘웨이홀에서 다루는 인문주의는 세상과 '현재'에 대한 것이고, 나 자신을 극복하여 좀 더 현명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문주의에 대한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공연에 가도 되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책을 도서관에서 읽어도 되는 것이다.
철학, 사회학, 문화 같은 인문학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다루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분야들이 인문주의라는 접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서의 실천, 즉 행동에 관련된 것들이 인문주의의 스펙트럼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에 인문학적인 탐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권 : 인문학이 주로 학구적인 영역에 속하고 인문주의가 실생활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짐 왈쉬 대표는 두 가지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고 있는가?
짐 : 2015년에는 개편된 강좌 프로그램이 제공될 예정이다. '인문주의 강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프로그램이 있는데, 여기에는 '인문주의의 일면들',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응용윤리학'이라는 세 가지 수업들이 있었다. 이 강좌들이 이제는 '죽음의 이해', '인문주의의 이해', '윤리학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여기에 '우정의 이해', '발언적 정의의 이해' 두 가지를 추가된다. 이 강좌들은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사람들이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5주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콘웨이홀에서 열리는 공연들과, 학위를 따는 수준의 학문적 탐구 사이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윤리학에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공부를 더 해서 철학 학위를 따면 되고, 윤리학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콘웨이홀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다른 행사에 참여해 윤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면 된다. 기본적으로는 지나치게 짜여지고 답답한 분위기를 탈피하는 것이 개편될 강좌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손 : 윤리 공동체도 결국은 사람의 모임이다. 어떻게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오래도록 결속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짐 : 사실 결속은 좋지 않다. 윤리 공동체는 400명의 회원을 두고 있고, 12명의 이사진은 3년의 임기를 두고 일하게 되어 있다. 주 강당 위에 써져 있는 '네 자신에게 진실되게 살라TO THINE OWN SELF BE TRUE' 라는 경구도 그렇고, 우리가 강조하는 '자유로운 발언'의 가치 때문인지 다들 공격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의견들을 피력하려 한다. 많은 회원들이 내가 주도하는 운영의 변화에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옛날에 하던 대로만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간혹 윤리 공동체가 인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조차 반대하는 식의 내부 견해 차이 때문에 결속을 유지하는 일은 대단히 힘들었다.
'쉽게 의견을 꺾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여러 다른 의견들의 표출을 상대적으로 억누른 쪽에 속한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잦은 의견다툼을 겪어야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다른 점은 윤리 공동체의 회원이 자신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0년동안 윤리 공동체는, 불행하게도 안일하게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 내 인식이기 때문이다. 윤리 공동체가 오랫동안 배타적인 집단 이상의 기능을 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더더욱 윌리엄 존슨 폭스와 몬큐어 콘웨이가 중요시했던 가치들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인문주의에 초점을 맞춘, 그러나 대중성을 잊지 않은 문화공간
짐 왈쉬 대표와의 대화를 통해 <생각공방>팀은 콘웨이홀과 윤리 공동체의 역사, 진행되는 프로그램, 운영 과정에서의 역경 등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콘웨이홀 윤리 공동체가 본래 종교 공동체에서 출발해 종교적 색채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급격한 질적 변화를 겪었음에도 콘웨이홀은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강연을 여전히 섭외하고 있었으며, 댄스 강좌 등의 대중 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Music Up Close', '인문주의 강좌'와 같은 자체 강의들을 통하여 인문학적 본질을 놓치지 않은 학습의 기회 또한 제공하고 있었다. 내부 공간을 대여하여 나름의 수익 창출을 꾀하고 5개년 전략 계획을 수립하는 등 문화시설로서 독립하기 위한 변화의 의지가 느껴지는 한편으로, 윤리 공동체와 콘웨이홀의 긴 역사가 한때는 배타적인 조직문화로 이어져 운영에 문제를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 콘웨이홀은 그렇게 숱한 역경을 거치는 한편, 윤리 공동체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콘웨이홀은 공립 도서관의 성격이 남아있는 아이디어 스토어와는 달리 그 시초가 민간 단체를 위한 공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와 같은 특정 사상을 기반에 둔 운영이 가능했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 스토어가 지역 주민들의 수요와 관계 없는 학습 프로그램을 따로 기획하기 어려운 것과는 달리 윤리 공동체로서의 가치를 강연이나 강좌들에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도서관 서가와 주 강당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한편, 인문학 공간으로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시설로 콘웨이홀은 아주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생각공방>팀은 콘웨이홀 견학을 마쳤다.
콘웨이 홀 / Conway Hall
위치 Conway Hall, 25 Red Lion Square, London WC1R 4RL, United Kingdom
전화번호 +44-20-7405-1818
홈페이지 http://conwayhall.org.uk
WRITER 손성호
PHOTOGRAPHER 박창현, 손성호
INTERVIEWER 권은진, 손성호, 박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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