ココルーム & カマンメディアセンタ (코코룸, 카만! 미디어센터)
1) 기본 정보
창립년도 |
2008년 1월 / 설립자 : 우에다 카나요 |
현 대표 |
우에다 카나요 (1969년 일본 나라현 生, 시인, 사업가, 코코룸 운영자) |
연락처 |
06-6636-1612 |
주소 |
〒557-0001 大阪府大阪市西成区山王1丁目15−11 釜が崎 |
홈페이지 |
|
조직구성 |
ART NPO |
기관 설립 배경 및 목적 |
카나요씨는 관민이 따로 또 같이 손을 잡고 시작한 아트센터, ‘신세카이 아츠파크(Arts Park)’ 사업으로 세금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공공성이 담보된 활동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고민 끝에 ‘이곳을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예술가와 예술에 흥미를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의 장치로서 ‘카페(코코룸)’를 열어 어떤 형태로 예술이 사회와 관여해 나갈 것인지를 모색키로 한 것입니다. |
현황 |
현대문학NPO로서 활동을 시작, 특정 예술장르를 정하지 않는 횡단형 아트 NPO 표방 |
2) 탐방 결과
방문 일시 |
2012년 7월 19일 (목) ~ 7월 22일 (일) |
방문 장소 |
COCOROOM (코코룸) |
기관담당자 |
우에다 카나요 / 코코룸 대표 / sakiko@hanareproject.net |
방문목적 |
- 일본 3대 슬럼가 중, 카마가사키에서 카페의 역할 |
카마가사키(釜が崎)에서 일상을 보내다!
5월 초 부산에서 만난 류성효 감독님과 장현정 부산노리단 공동대표님의 적극 추천을 받고 급작스럽게 카마가사키
일정을 넣었습니다. 일본 3대 슬럼가 중의 하나인 카마가사키. 일본 고도성장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4일간 일상을 보냈습니다. 귀찮은 내색 한 번도 없이 4일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카나요씨와 함께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인터뷰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Interview ① 첫째 날. 7월 19일(목) 18:00 ~
일본 오사카 코코룸에서의 첫 만남, 첫 번째 인터뷰
※ 첫번째 인터뷰의 내용은 전은휘씨가 코코룸 탐방오기 전에 코코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어느 정도 알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보내온 플랫폼 관련 기사 내용이 주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우에다 카나요, “엉거주춤, 하지만 유연한 코코룸의 도전”, 플랫폼 29(SEP/OCT 2011), PP. 17~23.
참석자 : 정동욱, 우승현, 심재은, 김지형, 김지연
가마가시키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코코룸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두고 바로 코코룸에서 소개와 첫 번째 인터뷰 자리를 가졌습니다. 우선 카나요상께서 체화당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것이 있다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시는 가운데 차라리 우리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먼저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승현씨가 체화당 PT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나요상이 코코룸이 현재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 어떻게 코코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카나요 원래 직업은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이라면 일본에서는 자신의 시집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사카 문화국 시설 가운데 빈 장소가 있었습니다. 3개의 NPO가 이미 들어가기로 했고, 카나요상이 네 번째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전기와 수도가 무료로 제공되는 만큼 그다지 인기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세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익적인 측면에서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서 처음에 청년들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우선 여러 사람들을 모이게 하기 위해서 카페가 필요했습니다. 손님들이 직접 설거지를 하고 사회 문제나 인간관계 등 고민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ART NPO를 설립했습니다(우리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예술이라는 표현방법을 통해서 사회적 기여를 하는 NPO입니다. 100명 정도 들어왔습니다. 2003년에 이 공간에서 시작했고, 오사카 시에서 10년 정도 담보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60년대 고도성장으로 노동자들이 건설. 노동조건이 안 좋아서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5년째 되는 해에 오사카시에서 갑자기 나가라고 해서 2008년 1월 지금 이 자리로 이동했습니다. 반년 있었을 때 살인 등 사건으로 이곳에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리먼 쇼크로 동경에서 실직자들이 요요기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기도 하고 이곳에서 많이들 유입되었습니다. 전에 있던 곳과 다르게 보통 카마가사키에 오면 쇼크를 받고 아무것도 못한 채로 있다가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여니깐 좋아하기도 했지만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청소하는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신뢰를 형성하고 행사도 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 곳으로 이미지 개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홈리스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할 뿐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끼가 많고 자기표현이 풍부합니다. 특히 예술가 홈리스들이 많은데 이들이 직접 발표할 수 있도록 이들을 관리하면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카마가사키는 일본이 아니다.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JR(Japan Railway) 환상선의 철도고가 건너편에 펼쳐진 카마가사키는 눈에 보이는 존재지만 마치 투명한 벽에 둘러싸여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JR철도 아래쪽의 카마가사키는 일본이 아닙니다. 건너편의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이곳은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자녀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도성장의 이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카마가사키는 일본에게는 숨기고 싶은 곳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들 하지만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타인과 삶을 공유하지 않는 그 쪽 일본과는 다릅니다. 3,4년 전에 신사이바시역에서 생활고에 아이들 둘을 두고 어머니가 전철에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여기 사람들은 그 어머니가 이곳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최근 차기 강력한 수상 후보인 오사카 시장이 이곳을 아이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특별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이 마을에 지식인 회의가 만들어졌고 이 회의에는 NPO, 원주민 조직, 운동 조직 이렇게 세 개가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 오기 전 홈페이지를 보면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는데 프로그램은 어떤 식으로 기획하고 있습니까?
카나요 프로그램 기획은 그 때 그 때 직원들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 편입니다. 나의 경우 20살부터 메모하고 있는 아이디어 노트가 있습니다. 그 노트를 참고합니다.
― 현재 직원들은 몇 명이고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합니까?
카나요 현재 직원은 3명입니다.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있어서 손님과 선을 긋는 일이 중요합니다. 손님과 교류를 즐기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인건비는 어떻게 합니까?
카나요 조성금, 카페 수익, 맨션 운영으로 하고 있습니다. 카페 수익의 경우 최근 중노동자의 수명이 짧아지면서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 카만! 미디어센터에 대해서 설명해주십시오.
카나요 미디어센터의 이름을 지을 때 지역에서 카마가사키라는 이름을 넣는 것을 반대해서 미디어센터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Field Tour ① 첫째 날. 7월 19일(목) 20:00 ~ 21:30
주변을 잠깐 돌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에 일행들이 함께 했습니다. 견학을 가기 전 카나요상은 우리에게 민감한 곳이라 사진 촬영은 허락된 곳에서만, 그리고 집장촌에 들어설 때는 카메라를 깊숙이 넣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코코룸에서 부터 양쪽으로 이어지는 상가들. 그리고 그 상가 앞에 누워있는 노숙자들. 시큼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어쩌다 서울역을 갈 때 노숙자들을 보긴 했지만 일상에서 자주 보지 않기 때문에 약간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분을 걷다 카마가사키를 약간 벗어난 곳에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평수가 꽤나 할 것 같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층이라 이 아파트에서 낮은 건물이 많은 카마가사키가 한 눈에 보일 것입니다. 잠깐 벗어났을 뿐인데 천지차이, 다른 곳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아파트 경계에 큰 벽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곧 가게 될 집장촌 여자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야쿠자들이 이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벽이 사라져서 그런지 바로 옆에 집장촌인 듯 보이는 가게가 언뜻 언뜻 보입니다. 딸 코코미짱과 함께 둘러보고 있는 카나요상이 집장촌으로 들어가겠냐고 물어서 약간 당황하고 주저했지만 나서기로 했습니다. 일본 최대의 집장촌인 그 안으로 우리는 들어갔습니다. 원래 집장촌은 불법이긴 하지만 이곳은 경찰도 손을 못 대는 구역이라고 합니다. 가로등 대신 전통 등이 달려있는 그래서 과거 오사카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용산역 짧은 집장촌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입니다. 여자로서 혹시나 기분 상할까봐 거기에서 일하는 여성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각 가게마다 여자들이 야한 옷을 입고 앉아있고 그 앞에는 할머니들이 남자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사가 워낙 잘되어서 이곳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길의 끝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카나요상이 이곳의 인구는 15만 명 정도가 되는데, 이 중에 만 명이 생활보호대상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85%가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조건에서 근처에 초등학교가 원래 1,500명 정도였는데 현재 전교생이 60명이라고 합니다. 홈리스에 집장촌에 야쿠자들까지 이 지역에는 감시카메라가 무려 13개가 있다고 합니다. 식당 등 상점을 좀 벗어나니 이번에는 술집들이 즐비했는데, 그 곳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손님들과 노래도 부르고 술시중도 하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왜 일본인들조차 이곳이 대단한 충격인지 견학을 하고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인생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동네. 그래서 카나요상이 더 대단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자녀를 키우기에는 최악의 조건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어린 딸 코코미짱을 데리고 집장촌을 걸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있어서인지 집장촌의 여성분들은 거부감 없이 아이를 귀여워해줬습니다. 하지만 교육학이 전공인 김난실 박사님께서 주위 환경이 자녀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은 카나요상에게 무색한 것 같다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이곳에서 딸 코코미짱을 계속 키울 거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일인데 왜 물어보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날 나는 운동가, 활동가가 아닌 카마가사키를 사랑하는 한 지역주민으로서 이곳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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