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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EEKER:S Story/*완주적정기술숙녀회

[완숙회 해외탐방] 당위나 가치에 기대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의 힘

[완숙회 해외탐방] 탐방후기 이지정

 

당위나 가치에 기대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의 힘




순진한 생각에 약간은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오리엔테이션과 멘토링을 거치면서 그런 들뜬 기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계속되는 질문과 의구심이 이어졌다. 우리는 왜 CAT에 가야만 하는가? 우리가 가진 문제의식에 문제는 없는지? 우리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가 될 것인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기관과 우리가 가진(소셜 미션이라고 하기엔 다소 추상적인) 문제의식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의 부족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최종 선발되어 CAT에 다녀온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만큼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됐고 그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숙제가 될 것이다.

 

탐방지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CAT을 선택했고 CAT에만 2주 동안 머무르기로 한 것이 조금은 무모한 선택으로 비춰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지역의 여성, 청년들의 자립적인 생활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좋은 참고가 될 만한 곳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깊게 관찰한 덕분에 스쳐지나갔다면 보지 못했을 작은 부분들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러한 디테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시스템/환경을 구성하는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관의 이름이 대안기술센터이긴 하지만 이미 대안기술을 넘어서 더 넒은 차원의 지속가능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재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CAT의 공간이 오랜 시간을 통해 안정적으로 구축된 하나의 온전한 시스템/환경이라는 점이다. 중앙의 전기/물 공급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off-grid) 지속가능한 상태이다. 전기는 2010년까지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되어 있는데 확인해보지 못했고 물의 경우 공급과 처리가 현재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센터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지대의 저수지에 물을 모아 가장 단순한 수처리 방식인 모래여과로 정수처리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화장실 오수를 비롯한 발생되는 모든 오폐수는 센터 아래에 위치한 생태습지를 통해 처리하여 근처 하천에 방류되고 있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생태적인 수처리 공정이 실제로 구현되어 있는 사례를 보는 것 자체가 크나큰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잘 만들어진 시스템/환경이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물의 화장실, 개수대에는 이 하수가 생태습지에서 처리되고 있으니 휴지 외에는 버리지 말고 친환경제품을 써달라고 안내되어 있는데 이 메모를 보고 나니 별안간 나의 행동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물이 어디서 오는지, 내가 사용한 물과 화학제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히니 내가 하는 행동이 그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아주 명확해진다. 가져온 일반 치약을 차마 쓸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환경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한 개인이 친환경제품을 쓴다 해도 그 행동은 시스템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그러한 노력이 유효하려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친환경 제품을 쓰는 방식으로 행동에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당위나 가치에 기대지 않고도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 공간의 힘이 놀라웠다.

 



비단 이것은 기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CAT은 오래 전부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오다 보니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여성을 포함하는 소수자를 배려하는 좋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곳에 오게 되면 소외받지 않는 따뜻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한국에서 이런 환영을 받은 적이 있었나 싶은 정도로 지내는 동안 내내 고마움을 느끼며 지냈다. 실제로 우리가 인터뷰를 했던 로지라는 분도 자원봉사를 했던 좋은 기억으로 런던을 떠나 CAT 근처의 타운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과 젊은이 등에게 기술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자의 입장에 위치하는 사람들에게도 장벽이 없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현재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좋은 시스템과 환경은 작은 노력들이 꾸준히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도 크게 배운 점이다. CAT에는 70년대부터 가드너로 일하시는 로저 할아버지가 계신다. 아침을 먹고 나서 차 한 잔을 하며 밖을 내다보면 출근하신 로저 할아버지가 정원을 한 바퀴 쓰윽 훑어보고 지나가신다. 매일매일 그렇게 30년 넘게 그의 손길이 스친 걸 생각하니 약간은 뭉클해지기도 했다.

CAT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면 이렇게 모든 장소에 누군가의 노력이 깃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어제는 분명히 이 쪽 난간이 망가져 있었는데 다음날 가보면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물론 곳곳에 친절한 설명이 적혀있고 매일매일 티나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작은 노력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탄생했으리라. 숙소 안까지 새가 들어오기도 하고 교육장 서까래에는 새들이 새끼를 낳기도 하는 곳이다.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괜스레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오는 것은 내가 감상적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하고 온지도 2주 가까이 지나간다. 완주로 돌아와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니 왠지 내 집이 아닌 것 같아 어색했는데 그 다음날이 되니 언제 영국에 다녀왔냐는 듯이 아주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무시무시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완숙회는 자기 사업을 하는 팀이 아니라 직장인이다 보니 이후의 일을 도모하기가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내가 경험하고 온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작은 변화를 이어나가 보고자 한다. 어느 누가 오더라도 편하고 따뜻하게 어울릴 수 있는 좋은 환경,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대해 장기적으로 고민해봐야겠다. CAT은 무려 40년 동안 해오지 않았는가. 좋은 출발과 더불어 우리 모두 함께하는 꾸준한 실천이 답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살기 좋은 곳이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