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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Globalwork Story/미르(동북아평화)

Chapter 7.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알혼섬에서보내는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횡단열차에서내리자 마자 만나게 된 한국인 가이드는 여정의 반정도를 같이 보내서 그런지 친근해졌는데 우리에게아침마다 678혹은789라고전날 저녁 스케줄을 이야기해주었다.6786시기상,7시아침식사,8시출발.마지막날은567이었다.5시기상,6시아침식사 7시출발가까스로일어나 이제 알혼섬에서의 생활이 꽤 적응되었다고야외에 있는 세면대에서 찬물로 머리도 잘 감는다.


알혼섬으로들어올 때 그렇게 왔던 것 처럼 이르쿠츠크로 들어갈때도 똑같은 여정이다.약한시간 배를 타고 마지막으로 바이칼 호숫물을 보는둥 마는 둥.내내피곤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하지만숨돌릴 틈 없이 우리는 이동을 해야했으니까 가이드씨를졸졸 따라 우린 버스에 올랐다.
 

몇시간이고달려 점심을 먹은 뒤에 이르쿠츠크 시내 관광에 나섰다.햇빛은몹시 뜨거워 피부가 아플 지경이었다.도대체시베리아의 파리는 어떤가 싶었다.


우선 우리는 버스에서 ‘제독의 연인’(러시아어Адмираль)이라는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는 러시아판 타이타닉으로알려져 있다.‘제독의연인’은 러시아 제국의 전쟁 영웅 ‘알렉산드르 코르챠크’의 로맨스를 바탕으로 그가 사랑했던 여자,안나와의 사랑을 담고 있다러시아 해군 함대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53통의 러브레터가 100여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영화 ‘제독의 연인으로 옮겨져 왔다.


실존인물인 ‘알렉산드르 코르챠크’ 제독의 사진이다.이사람의 동상이 이르쿠츠크 시내에 있었다.




러시아내전 당시 소비에트 군대적군에 반대하던 백군을 지휘하다 끝내 소비에트 군대에 잡혀 총살당하고 만다하지만 소비에트 정부가 무너지면서 전쟁 영웅이던 그를 다시 재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게 된 쯔나멘스키 사원이다.


러시아 사원은 언제나 그렇듯 화려하다카톨릭과는 또다른 의미로 화려함인데 어떤 사원이든 이런 성상화가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우린 데까브리스트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발꼰스키의 저택을 찾아갔다.

러시아어로12월이‘Дкабрь’(데까브리)인데그래서 1825년 12월에 짜르(황제)에 반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일컬어 디까브리스트라고 부른다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약 120명에 달하는 청년 지식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했으나이 혁명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화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저택의 주인인 세르게이 발콘스키 백작이다.디까브리스트 혁명은 청년 귀족,장교 계급에서 일어났는데 발단은 1807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이었다프랑스군은 모스크바로 들어오는데 러시아인은 모스크바를 모두 불태워 비우고 후퇴를 했고 프랑스군은 식량도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버텨야 했다프랑스군은 모스크바로부터 후퇴를 하게 되었고 러시아군은 프랑스 빠리까지 진격하게 된다그곳에서 젊은 청년 장교들은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민주주의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귀국 후 아직도 러시아에 남아있는 농노제도와 봉건제도부정부패가난그리고 자신들과 함께 싸우던 농민 군대를 다시 농민 계급으로 돌려 보내는 것에 대한 갈등으로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것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 디까브리스트 중의 핵심 인물이었던 발꼰스키 역시 혁명 실패 후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발꼰스키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이 이르쿠츠크를 지금의 모습,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사진은 발꼰스키의 아내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의당시 생활을 묘사해놓은 그림이다.앙상하게야윈 모습의 데카브리스트들의 발목에는 22kg무게의쇠고랑이 채워져있다.옆에서음식을 나눠주고 있는 여인과 아래 여자들은 남편을따라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을 선택한 아내들로,당시자식과 재산을 포함하여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이곳에올 수 있었다.이러한 여인들로 인해 이르쿠츠크는 살롱 문화 그리고 시 낭송회,음악회등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을 나와서 이 때 지식인들을 박해한 것이 외려 이 도시에겐 크나큰 유산을 안겨주었다고 느꼈다. 이로 인해 기존에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황폐해질 수 밖에 없었던 시베리아에서 그나마 이런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시내 구경을 하던 중 우리는 우리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 바이칼, 그리고 마지막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가이드씨의 생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시내구경 30분 자유시간 틈을 타 청년들끼리 이야기해 조촐한 케익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깜-짝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듯 했지만 뭐 환하게 웃으면서 이런 것은 처음 받아본다며 기뻐해주는 모습에 우리 모두 뿌듯한 마음.

 

  작은 케익인데도 무척이나 기뻐하며 좋아하는 모습에 우리까지 훈훈해졌다. 사람도 많고 스케줄이 뒤엉켜 짜증나는 상황이었을텐데도 늘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답해주는 모습에 우리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전공자라 이르쿠츠크의 학교들과 같은 것들을 간간히 물어보았는데도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해서 많이 고마웠다.

 저녁을 먹고 마트에서 간단히 쇼핑을 한 후 알렉산드르 3세 동상과 이르쿠츠크 야경을 보기로 했다. 

 
 알렉산드르 3세 동상은 1908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는데 가장 기초를 세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러시아의 여름은 해가 늦게 지는 백야로도 유명한데 이 때가 밤 열한시가 훌쩍 넘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덟-아홉시와 같은 하늘이었다. 북쪽으로 갈 수록 이 현상은 더 심해지는데 러시아 제 2의 도시인 상뜨 뻬쩨르부르그가 백야를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맥주병을 혹은 음료수병을 들고 삼삼오오 수다를 떨거나 산책을 한다. 작년에 나도 그랬었지 하면서 마음이 쓸쓸해졌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시베리아가 동양적일 수도, 서양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외려 서구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시베리아에서도 동쪽에 치우쳐 있는 이르쿠츠크라는 도시는 매우 작고 (그래봤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넓-은 도시이기 그지없지만), 후줄근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타 크고 작은 도시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것이 비단 바이칼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은 그들이 지금껏 가꾸고 보존해온 문화와 관련있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