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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SEEKER:S Story/*생각공방

[해외탐방프로젝트 #4] '적극적인 게으름'의 공간, 아이들러 아카데미 / 생각공방



아이들러Idler... '놓아두는 사람'?


영어에서 idle이란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idle하다는 것은 곧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표현에 r을 붙여서 아이들러, 즉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의 느낌을 풍기는 표현을 아예 시설의 이름에다 적어버린 곳이 있었으니, 런던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아이들러 아카데미였다. 웹사이트를 방문했을 때는 각종 강의들을 인터넷으로 예약할 수 있는, 일종의 인생학교 같은 시설이라는 인상을 주는 한편으로 그리스 철학 강의와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래밍 강좌가 모두 준비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에 <생각공방>팀원들은 호기심을 자제할 수 없었다.



"Books & Coffee" - 여유를 즐기다 가세요


실제로 아이들러 아카데미의 내부 구조는 인생학교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1층에는 로비를 겸한 서점이 있었고, 강의를 위한 공간은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러 아카데미의 구조는 인생학교와 구별되는 차이점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다. 1층 로비에는 방문객들이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로비 뒤쪽으로는 작은 정원이 있어 사람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러 아카데미를 찾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시간을 보내다 가도 좋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져 둘러보는 내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린 뒤 <생각공방>팀은 아이들러 아카데미의 대표인 톰 호킨슨Tom Hogdkinson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무척 바빠 보였지만 함께 하는 내내 유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열정에 찬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손 : '아이들링idling'에 담긴 의미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


톰 :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정작 우리는 바쁘게 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쁘게 일하고 있다'는 시각은 여가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낡은 견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나 다름 없는 이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 영어에서 학교를 뜻하는 'school'의 뿌리 단어인 그리스의 'scholar'가 사실은 자유 시간이나 여가를 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에서 이어져 내려온 이 오래된 시각이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동기중 하나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이란 텔레비전을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식의 쾌락 추구적인 성격을 띤다. 일에서 '도망친다'는 의미가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여가 시간이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여가시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그 여가 시간에 학교로 가서 철학, 천문학, 수학, 음악, 예술을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옛 기독교에서도 여가와 관련된 중요한 개념들이 있어서, 중세의 수도승들은 휴식을 취하고 묵상을 했으며 일자리에서는 창의성을 발휘해 아름다운 책이나 경전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테스탄트(개신교) 문화가 유입되면서 중세 말기에는 이런 문화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기 시작했고, 오래된 종교적 관습들이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인생은 오로지 열심히 일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만히 쉬는 것은 죄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정착된 것이다.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가시간이란 원래 철학이나 예술, 시 같은 것을 배우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요즘은 교육을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오로지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들만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를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누고, 소크라테스에 대해 배우거나 손글씨를 아름답게 배우는 등의 활동들이다. 


권 : 그러면 생활에서의 '아이들링'이란 게으르게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톰 : 그렇다. 여기에서 '아이들링'이 의미하는 것은 내 자신의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직장에 다녀와서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는 사람들을 게으르다고들 하는데, '아이들링'은 오히려 정신적인 근면함에 가까운 의미를 담고 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을 하는 것은 휴식을 취하면서도 오히려 게으르지 않은 행동이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게으른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뇌에도 좋고, 아마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웃음)


손 :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수업들을 웹사이트를 통해 미리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는 수업의 주제나 세부 사항들을 어떻게 기획하는지가 궁금하다.


톰 : 처음 이 곳을 열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경영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조사 같은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듣고 싶을 만한 강의들을 준비했다. 내가 악필이었기 때문에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를 준비하고, 그리스 철학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것도 강의로 준비했다. 천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코딩(프로그래밍) 수업의 경우에는 내 친구 한 명이 일종의 현대판 라틴어라고 하면서 추천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기획하게 되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건 문법이나 글씨 예쁘게 쓰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다. 기본적으로 아이들러 아카데미는 역사가 오래된 분야들을 다루는 편이지만, 프로그래밍처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수업들은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다. 우리 아들의 경우에도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듣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 : 우리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이들링'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대중들에게 '아이들링'의 개념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역경 같은 것이 있는가?


톰 : 사람들은 항상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이런 통념들이 종종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나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우리가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오랫동안 나의 팬을 자처했던 사람들이 '톰이 하는 짓 봤어? 이제는 노팅 힐에서 케이크를 팔아 돈을 벌려고 하는구먼' 하고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떠나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이 음악 밴드에서는 흔한 일 같다. 밴드가 처음 시작할 때 있던 팬들은 시간이 지나는 과정에서 상당수 떠나가는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 적대적인 사람들은 예전에는 오히려 나를 좋아하던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업을 벌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하지만 정작 불평을 하는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어려운 점들이 있다면 건물주나 은행, 세무서와 계속 씨름해야만 일을 굴러가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있다. 아이들러 아카데미를 계속 운영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했던 지루한 일들이 많았다.


손 : 아이들러 아카데미에 오기를 선호하는 특정 집단이 있는지?


톰 : 중년층의 비중이 생각보다 적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가 좀 더 많이 든 분들이 온다.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대개 많이 바빠서, 아이들을 돌보고 직장 일에 신경을 쓰고 하다 보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30대 미만의 젊은이들이나 마흔 다섯 살 이상의 장년층들이 아이들러 아카데미를 찾는 편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여가시간이 좀 더 있는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이 특히 이런 곳에 올 만큼의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연령대의 분포로 이야기하자면 이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는 대단히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나이가 든 분들은 사교에 좀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서예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우쿨렐레 수업 같은 경우는 모든 연령대가 다 모인다. 하지만 어떤 수업에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이 몰린다고 확답을 줄 수는 없겠다. 젊은 사람들만 우쿨렐레 수업을 찾고 나이든 분들이 철학 수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손 : 한국에도 아이들러 아카데미와 유사한 곳들이 몇 군데 있다. 은진 팀장의 말에 따르면 그런 곳들도 글씨 쓰기 수업 같은 것을 철학 수업과 함께 제공했는데, 그 기관들이 의도했던 것은 사람들이 결국 철학 수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대중들은 글씨 쓰기 수업에만 관심을 보였고 철학 수업은 결국 폐강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의 문제점을 경험한 적은 없었는가?


톰 : 맞는 말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철학에서 별다른 유용성을 얼른 찾기 힘들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는 철학 수업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보다 명확한 지식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보통 사람들은 철학이 '내가 이 방을 나가면 테이블이 아직도 그 곳에 있는가' 와 같은 추상적인 질문들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철학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 실용적인 측면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권 : '아이들링'의 철학이 어떻게 이런 공간을 운영하는 데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이 '아이들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가?


톰 : 실제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환상적인 일이다. 우리가 팔고 싶은 책들만 골라서 팔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 직업은 기본적으로 언론인이고 작가인데, 이 가게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과 웹사이트를 통한 업무도 모두 소통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올 수 있고, 동시에 그들을 기쁘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저 먹고 사는 데에만 신경쓰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울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보람이 있다.



유쾌함과 여유가 있는, 그러나 게으르지만은 않은 공간

 

인터뷰가 끝난 뒤 톰 대표는 우리에게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 제공되고 있는 강좌들의 종류를 간단히 알려주고,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울 예정인 인터넷 강의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물리적 실체가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을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에서의 학습을 꺼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런던에서 시작해 다른 여러 나라들에 분교를 두고 있는 인생학교처럼, 아이들러 아카데미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 '아이들링'의 철학을 더 넓은 세계에 퍼뜨리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콘웨이홀에서 만났던 짐 왈쉬 대표의 경우 역사가 오래된 기관의 미래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중후함이 느껴졌던 반면,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 만난 톰 호킨슨 대표에게서는 자신이 스스로 시작한 일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는 자체에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좀 더 강했다. 


아이들러 아카데미는 콘웨이홀처럼 '아이들링'이라는 일종의 설립이념이 시설과 제공되는 강의 전반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인생학교처럼 강의 컨텐츠 제공과 도서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고 있었다. 우리가 탐방을 하기로 결정했던 기관 세 곳이 묘하게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러 아카데미에서 제공되는 수업을 직접 참관해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는 한편, 톰 호킨슨이 선뜻 선물로 건넨 본인의 저서에 들뜬 채 <생각공방>팀은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러 아카데미 / The Idler Academy

  위치 The Idler Academy, 81 Westbourne Park Road, London W2 5QH, United Kingdom

  전화번호 +44-20-7221-5908

  홈페이지 http://idler.co.uk


WRITER 손성호

PHOTOGRAPHER 박창현, 권은진

INTERVIEWER 권은진, 손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