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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EEKER:S Story/*훌라

[해외탐방기] 훌라(7) 오르비에토: 어그리투리스모 파토리아 라 고치아 Agriturismo Fattoria la Goccia

나폴리를 떠나 오르비에토로 향한 훌라 멤버들. 장시간의 운전으로 점점 피폐해질 때쯤.......! 마이의 농장에 도착했다!

 

온갖 동물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농장을 향하는 산길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어.... 약간, 이건.... 천국인가!? 싶었던 인상을 줬다. 동물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사람들을 반겨주고, 자연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린 로마에서 만났던 '마이'와 다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수시간을 자동차로 달려온 우리를 직접 담근 시원한 와인과 함께 반겨주던 마이

 

 

마이의 농장은 스쾃 이후 안정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커뮤니티 기반의 지속가능한 라이프 무브먼트 공간으로 운영 중이었다. 훌라의 시선으로 이곳은 '변방의 전술공간'이자 '삶의 터전'이 된 점거 농장이었는데, 빈 농가를 점거하여 자율주의 농민운동에 동참하는 그룹으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현재 숙박, 동물치유, 체험프로그램, 식사제공, 농산물 생산 및 판매 등이 이루어지는 커뮤니티 농장으로 자리잡아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머물며 농장을 둘러보고, 동물치유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에 동참했다. 인터뷰는 농장의 주인인 마이와 그의 파트너 리카르도, 근처 다른 점거농장에서 살고 있는 프랑코와 함께 했다.

 

 


 

"인터뷰1: 직접행동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마이의 점거운동과 땅에 대한 생각"

 

Q. 오랫동안 점거운동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A. 나는 지금은 스페인에 속해있는 바스크 출신이다. 스페인 프랑코 시절 억압을 많이 당하고 언어도 금지시키고 학교도 폐쇄해서 스페인 학교를 가게 만들었다. 정책적으로 스페인에 흡수시키고자했다. 이에 주민들은 저항해왔다. 바스크가 경제적으로 열악할지 몰라도 천연자원은 풍부한 곳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정부에서는 이곳의 천연림 등을 망치기로 작정했다. 이곳은 비도 많이 오고 수자원이 풍부한 곳인데, 일부러 댐 건설을 해서 병에 든 물을 사 먹게 하려 했다. 직접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이에 저항하는 생태운동들이 벌어졌다.

 

내가 18살때 나를 포함한 9명의 멤버들이 일련의 급진적 활동을 펼쳤는데 그 중에 하나가 거대 케이블을 끊는 작전이었다. 이를 통해 스페인정부의 경제적 손실은 매우 컸다. 그럼에도 8명의 멤버들이 기소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당시 경비원의 총을 뺏어서 지붕위에 올려두고 한 시간 반 정도 묶어두었는데, 이를 사유로 우리는 룩셈부르크로 도피하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스페인 정부의 행태를 고발하였다. 그런데 당시 같이 활동하는 이들이 영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나는 통역으로 계속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Q. 어떻게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그 전에 어떤 류의 스쾃활동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가?

A.

"1999년 런던 밀리니엄휠 점거"

1999년에는 런던에서 밀레니엄휠을 점거했는데, 이곳은 2000년에 개장을 준비하고 있던 곳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기어 올라갔는데, 실제로 우리는 모두 탁월한 클라이밍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 올라 해먹에서 4일을 보냈다. 우리는 이곳 개장 10일 전쯤 이 행동을 했다. 우리는 1210일에 그곳을 점거하고 인권을 위한 농성을 벌였다.

 

"2000년 바티칸 점거"

2000, 로마에서는 150명 정도가 우리를 도와줬다. 바티칸에 들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벽을 오르기 위한 여러 장비도 필요했다. 우리는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3개월을 준비했다. 우리는 두 가지 메시지를 실었다. “NO DAMS", "WHAT ARE THE HUMAN RIGHTS?" 왜냐하면 댐을 이렇게 만들게 되면 물은 사유재가 되고 이를 병에 담아 파는 것을 사마셔야 하게 되기 때문이다. 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때는 새천년의 시작이었고,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같은 9명의 히피가 거기 들어가서 이러한 액션을 하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때는 전유럽이 함께 했다. 우리는 이 행동을 위해 3개월간, 이 주변을 관찰하고 장비를 갖추는등 철저한 준비를 기했다. 007작전을 수행하듯이. 나 외에 8명은 경찰에 눈에 띄면 바로 잡혀갈 상황이었기 때문에 포르테 프레네스티노 같은 점거공간에 숨어있었고, 현장을 답사하고 카메라 위치나 경비원을 살피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3개월간 우리는 로마에 있는 여러 점거공간들에 머물렀고 그때 로마에서의 점거형태를 보고 상당히 놀랐었다. 건물을 점거하여 500명이나 되는 여러 가족들이 살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로마에 비하니 영국의 점거는 일종의 패션처럼 보일 정도였다. 행동주의자로서 나는 인권을 위해 점거농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지붕을 갖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우리는 모두 어렸다. 근데 이곳에 왔더니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수백명의 사람들이 함께 점거하고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로서는 무척 놀라운 일이었고 이것 때문에 나는 로마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로마의 점거운동을 살펴보고 탐사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신들이 이렇게 다니는 것처럼. 나는 이탈리아 삶으로 존재하는 점거운동에 대해 알기 위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니까 2000년에 바티칸 점거를 위해 처음 로마에 왔던 것이고 당시 런던에 있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돌아가서 6개월 정도 일을 더 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2001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로마의 포르테 프레네스티노에서 살다가 200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돌아갔었고, 그때 나는 6개월 정도 있다 올거라 생각했는데 4년이나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시아로 도망갔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2년간 여행했다. 머리를 식히러. 그 이후 2014년에 돌아왔다.

 

 

Q. 점거운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누군가는 2채의 집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는 1채의 집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두 채의 집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누군가 만약 집 2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한 채를 10년간 비워두게 되면 그 집은 점거하는 이의 것이 된다. 10년 이상 집을 그냥 비워둬선 안 되기 때문이다. 지붕을 가질 권리는 누구나에게 있다. 영국에서는 이런 경우 인권을 남용한 것이라 판단하기에 이런 규제가 성립가능하다. 부자들은 여기저기 집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집 한 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건 옳지 않다.

 

이 지역의 많은 농장들은 지방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다. 50년 전쯤에 이 농장들은 버려졌다. 농업이 경제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들은 버려졌고 대도시를 떠나 자신의 삶을 전환하고 자연속에 살기 원하는 청년들이 이곳으로 왔고 이곳들을 점거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주변에 약 20개 정도가 그렇게 점거농장이 되었다.

 

며칠 후에 여러분이 가게 될 몬데지는 5년 정도 된 새로운 경우다. 하지만 그곳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이며, 지방정부와 다국적기업이 소유하다가 현재는 다국적기업이 빚 때문에 떠나고 지방정부가 이 땅을 팔려고 여러번 시도하다가 몬데지 사람들이 이 매각을 중지시켰다. 또한 이곳을 사고자 하던 다국적기업은 전 세계적으로 악랄한 짓을 자행하던 곳인데, 멕시코의 어떤 곳도 땅을 사서 그곳의 공동체가 사용해오던 수자원을 묶어버리고 코카콜라가 물보다 싸게 만들어버렸다.

 

몬데지 쪽 사람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주변사람들과 함께 큰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피렌체라 등지에서 콘서트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에게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의 행태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린다.

 

오늘날 정보홍수의 시대다. 하지만 실제로 이 세계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실제로 다국적 기업 누텔라는 이 근방에서 농부들로부터 땅을 사고 GMO 작물을 제배하면서 땅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에게 돈으로 땅을 하고 로컬라이프를 파괴한다. 삶의 방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단일작물제배이다. 땅도 휴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농사를 짓는 땅을 돌아가며 쉬게 해 준다. 우리가 24시간 계속 일할 수 없는 것처럼 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오래된 지식이다.

 

 

Q. 당신은 스스로를 반-자본주의자라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가?

A.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로봇처럼 일하러 가고 집에 오고 여가시간을 보내며 쳇바퀴돌 듯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돈이 필요할 때만 일하러 간다. 그 외의 시간에는 마크라메를 한다던가 언어를 배운다던가 여러 가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물론 내가 뭔가 한다는 건 그 자체가 일이다. 하지만 통역을 한다던가 하는 이런 일들은 그냥 무료로 하는 것들이다. 이게 가능한 건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명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다. 어떤 매스미디어나 유행에 따라 옷이나 화장품을 사고하는 것들 말이다. 난 화장을 해 본 적도 없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내 형제자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산에서 아주 단순한 삶을 산다. 그런데 젊은 세대를 보면 그들은 뭔가 끊임없이 사길 원하는 것 같다. 핸드폰이 필요하고, 타블렛이 필요하고, 새 모델이 나오면 또 그걸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계속되고 가속화되는 미친 짓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삶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 당신 삶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며, 돈이 지배하게 된다. 이건 미친 짓이다. 이렇게 살게 되면 생태적 사고가 마비된다. 우리는 현재 한계지점에 다다랐다. 쓰레기를 두고 보면 지난 40년 동안 너무나 많은 쓰레기를 생산했다. 오늘날 유럽의 쓰레기장은 아프리카이다. 그들을 두고 불쌍하다고 하면서 NGO는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모금을 하고 거기에 오래된 컴퓨터를 보낸다. 거기 버스가 필요하면 오래된 버스를 보내고 그렇게 3~5년 만에 물건들은 못 쓰는 것이 되어버린다.

 

농장에서의 따뜻한 환대

 

이때 마이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Q. “너희가 하고 싶은 건 뭐야?”

 

A. 우리는 대구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연구조사에서부터 기획과 콘텐츠 제작 그리고 공유의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발신하고 싶다. 도시를 생각해 보자라고 말이다.

사실 아직 우리 다음 단계가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진짜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고 싶다. 우리가 무엇에 둘러싸여있는지 생각해보기를, 우리는 너무 바쁘고 그저 소비하며 시간을 허비하는데 급급하지 않는지를 말이다. 익숙한 시스템을 낯설게 보고 그 관계에 대해 사유하며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주체적인 삶이 시작되고, 그 도시는 진정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진짜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노닐던 나귀는 여기서 처음 봤다.

 

마이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점거 농장에 살고 있다는 히피아저씨 프랑코를 초대해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또 다른 점거 농장의 프랑코 인터뷰"

 

 

Q. 농장점거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나는 북부이탈리아 오바다 산업지대에 공장노동자로 일하다가 1977년에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오바다의 공장들은 다 문을 닫았었고 농사를 지으며 대안적인 삶을 살고 싶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당시 80여명의 히피들이 빈 농가 10개 정도를 점거하여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의 커뮤니티를 이루며 원하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이곳에서 펼치고자 했다. 당시 땅은 지방정부 소유였으며 Agrifood라는 다국적 기업에서 이곳에 올리브나무를 가득 심었다가 제대로 운영을 안 하고 방치해둔 상태였다. 우리는 이 기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Cooperativa La racolta"라는 연합조직을 만들고 법적 권리를 주장해왔다. 70년대 당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 집들엔 물도 없고 전기도 없었다. 그리고 농가는 방치되어 있었고 밭도 엉망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청소하고 수리하고 살만하게 만들었다.

 

 

Q. 당시 청년이었을텐데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이전에 나는 돈을 벌고자 하는 경제적 이유로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도시에서 일했다. 하지만 돈을 벌어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돈이 아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연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Q. 이 지역의 점거운동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

A. 처음에 이 농장들은 로컬 사람들이 먼저 점거했다. 70년대 히피운동을 하던 한 친구가, 이곳에서 농장점거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려줘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70년대 이탈리아의 경제적 상황 상 농부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고, 도시의 공장들은 문을 닫으면서 이곳의 농가들은 빈 채로 남겨져 있었다. 우그렇게 이곳에 살기 시작했고 80년대에는 로마사람들도 이곳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배경을 지닌 조직들도 오기 시작하면서 자연 속의 극장이라는 프로젝트가 만들어졌고 이에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들은 여전히 여기 곳곳에 살고 있다.

 

5년 전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소유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대신에 상징적인 임대료 약 900유로를 정부에 내게 되었다. 정부 허가 아래 이러한 점거가 인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제스쳐. 이 전에는 늘 쫓겨날 위험에 놓여있었다. 경고딱지가 날아왔고 늘 긴장이 도사렸다. 하지만 이 협약 이후 거주를 인정하게 되면서 그런 일을 없어졌다.

이곳 옴브리아 지역은 공산당 무장단체들도 와서 공간을 점거하면서 유지의 딸을 유괴해 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싸잡아 추방의 위협을 당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은 없다. 정부에서 인정한 이유는 우리가 버려진 집들을 살만하게 만들었고 황폐해진 땅도 돌보고 회복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협약 이후로는 집단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Q. 지역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외부인들이 와서 빈 농장을 점거하며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

A. 사실 지역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알다시피 히피는 생김새부터가 재미있지 않나. 머리도 길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다니고. 거기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있으니까 상당히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리고 빈 집들이 사람들로 채워지니까 아무래도 싫어하진 않았다. 많을 땐 최대 200명까지도 있었다. 지금은 9-10채 정도가 남아있다. 히피들은 자녀를 낳아도 친부나 친모가 누구인지 알수 없다. 그렇다보니 대부분 자식세대들은 여길 떠나게 되고 히피들도 나이가 들어 떠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Q. 히피세대가 벌인 점거운동과 현재 젊은 세대들의 점거운동은 상당히 달라보인다. 맥락은 비슷한 것도 있지만 꽤 다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세대가 다르면 감성과 문법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것 같다. 하지만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이미 여기()에 다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소비하지 않고 삶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과 소비해버리는 것은 다르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소유하는 데 있어서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하다.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돈을 벌려고 시간을 소모하는 것 보다 현명한 일이다. 돈을 덜 필요로 하고 삶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려 하는 동기에서 출발하여 삶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농장을 운영하고 공간을 꾸려가는 이들의 이야기 외에도, 농장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과 워크숍, 동물들의 스쾃(!)까지 함께 했다. 또 농장의 경영을 위해 직접 만들고 있는 유제품 제작 과정도 슬그머니 따라다녔다:)

 

농장에서 진행하던 프로그램 중 피자만들기 워크숍을 구경했다.

 

 

직접 만든 치즈는 인기가 많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당나귀, , 고양이, , 소들이 어울려 노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것도 넓은 땅에서 말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다가왔고, 부비고 뒹굴고 다가왔다. 자연을 곁에 두는 것이야 말로 인류가 살아남을 길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음 행선지인 테라베네 몬데지로 향하기 위해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몬데지로 간다고 하자, 패트리치아 아주머니가 '얼마 전까지 이곳에 머물다간 프랑코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며 급히 메시지를 적어줬다.

덧붙여, 아무래도 오르비에토의 이 농장은 연령대도 상대적으로 높고, 정적이라면 몬데지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급진적이고 에너지도 높아 비교점이 많을 거라며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피렌체의 몬데지를 향했다.

 

떠나기 전날 밤, 떠나기 아쉬운 마음 가득했다